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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범주의 확장 - 2018 쓰읽말 과제

지금 보면 말투도 정제가 덜 되어있고 형식과 문체에서 서툰 티가 많이 난다. 주제가 쉬워서 그런가 내용 전개는 오히려 깔끔한 것 같기도 하다. 문단 나누기를 너무 자주 한 점도 눈에 띈다. 접속사나 연결사를 절대 안 쓰려고 했던 시절의 흔적이다. 교수님이 접속사(연결사)를 쓸 상황이면 문단을 나눠보라고 가르쳐주셨었는데, 나눴으면 각 문단의 분량을 다시 채워야 할 것을 나누기만 하고 말았다.
대학교 들어와서 과제로 작성한 글을 업로드합니다. 수정을 하고 올릴까도 했는데 대체로 너무 옛날에 쓴 글이라 지금 수정을 하자면 아예 새로 써야 하겠다 싶어 간단한 맞춤법 수정을 빼고는 그대로 올립니다.

 

지금 보면 말투도 정제가 덜 되어있고 형식과 문체에서 서툰 티가 많이 납니다. 주제가 쉬워서 그런가 내용 전개는 최근 것보다 오히려 깔끔한 것 같기도 하네요. 문단 나누기를 너무 자주 한 점도 눈에 띕니다. 접속사나 연결사를 절대 안 쓰려고 했던 시절의 흔적입니다. 교수님이 접속사(연결사)를 쓸 상황이면 문단을 나눠보라고 가르쳐주셨었는데, 나눴으면 각 문단의 분량을 다시 채워야 할 것을 나누기만 했던 결과입니다.


사무엘 버틀러의 『에레혼』을 읽고

 

목차
1. 어디까지가 인간인가?
2. 질병에 걸린 사람과 범죄자: 인간과 사회
3. 음악 은행과 이드그룬: 종교적 가치와 물질적 가치
4. 비이성의 대학: 인간은 이성적인가?
5. 인간과 기계: 기계는 의식을 가질 수 있는가?
6. 동물은 인간이 될 수 있는가?
7. 결론: 독립적인 의식을 가지는 존재로서의 인간
 


1. 어디까지가 인간인가?
 

두 사물이나 개념의 관계를 뒤집는 것은 그 대상을 이해하는데 꽤 유용한 방법이다. 새로운 질문을 던져, 편견에 사로잡혀 보지 못하던 것을 볼 수 있게 한다. 사무엘 버틀러는 에레혼에서 질병과 범죄, 종교적 가치와 물질적 가치, 이성과 비이성의 관계를 뒤엎는다.

마침내 인간과 기계를 뒤집고는, “무엇이 인간인가, 어디까지가 인간인가?” 질문을 던진다. 4차 산업혁명이라 말만 하면서 정작 그 내용은 3차 산업혁명에만 머물러 있는 지금, 우리가 진짜 4차 산업혁명을 맞이하기 위해 답해보아야 할 질문이다.

이 질문에 답하려면 우선 인간다움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해야 한다. 책 『에레혼』에 나온 순서를 따라 사무엘 버틀러가 뒤집은 개념 사이에서 인간다움을 찾아보겠다.

첫 번째로는 질병에 걸린 사람과 범죄자를 살펴본다. 에레혼은 질병에 걸리면 처벌받고, 범죄를 저지르면 치료받는다. 보통 질병은 우연하고 범죄는 악의적인 것으로 여겨지지만, 질병도 범죄도 한 개인만으로 원인을 이야기할 수 없다.

사무엘 버틀러는 종교적 가치를 돈으로 치환하고, 물질적 가치는 신으로 표현하여 뒤집었다.

세 번째로는 비이성의 대학에 관해 이야기하겠다. 당시는 인간의 이성을 중시한 계몽주의 사회였다. 비이성의 논리를 살펴보며 인간의 이성이 비이성적 결과를 낳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인간이 이성적인 존재라고 하지만, 한편에는 항상 비이성이 있다.

그다음에는 『에레혼』에 나오는 「기계의 책」 내용을 살펴보며 인간과 기계의 관계를 분석한다. 의식을 가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단순히 기능을 가지는 것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따져본다.

이어서, 좀 더 인간과 가까운 동물은 인간이 될 수 없을까 고민해 본다. 인간 수준의 지능을 가진 돌고래와 인간과 가장 가까운 반려동물은 인간과 비인간 사이 어디에 있을까?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인간은 인간과 동등한 존재로서 인권, 혹은 유사한 권리를 보장받는 개체를 의미한다. 생물학적인 인간 분류와는 전혀 별개임을 숙지해주길 바란다.

 

2. 질병에 걸린 사람과 범죄자: 인간과 사회

에레혼은 질병과 불운은 처벌받지만, 범죄와 부도덕함은 치료받는다. 에레혼 사람들은 범죄와 부도덕함을 창피하다고 할 뿐 이를 가까운 사람에게 말하는데 거리낌도 없고, 죄책감도 없다.

질병은 발각되면 처벌받아 감옥에 갇히거나 벌금을 물어야 한다. 질병은 본인이 원해서 걸린 것도 아니기에, 굉장히 억울하게 느껴진다. 질병이 걸린 것은 걸린 본인의 잘못이라기보다 물려받은 유전자, 자라온 환경, 우연한 사고(事故)의 영향이 크다.

범죄는 어떤가? 가만히 생각해보면 범죄도 그렇게 크게 다르지 않다. 범죄는 결코 범죄자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유전적으로 내재한 폭력성과 받아온 교육, 우발적 충동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일어나는 것이 범죄다.

『에레혼』 12장에 나오는 불평분자들은 질병에 걸려 감옥에 있는 사람에게 적절한 치료가 병행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단순히 가두고 처벌하는 것은 병을 악화시키기만 한다. 이는 병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환경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범죄자를 처벌하기만 해서 안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범죄는 단순히 개인의 악함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환경의 영향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범죄자를 더 열악한 환경으로 내모는 것은 재범률만 높인다. 질병에 걸린 사람을 치료하듯, 범죄자에게도 적절한 교육과 재사회화가 필요하다.

인간을 이해하는 데 있어 한 개인만 두고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주변을 배제하고 인간을 알려고 한다면 반드시 오류에 빠진다. 인간은 우선 자연 안에서 살아가며, 사회적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3. 음악 은행과 이드그룬: 종교적 가치와 물질적 가치

음악 은행의 존재는 굉장히 미묘하다. 에레혼 사람들은 음악 은행이 그 무엇보다 가치 있다고 말하지만, 이는 위선에 머무를 뿐 음악 은행에 기대하는 바는 없다. 음악 은행의 돈은 아주 먼 미래의 배당금을 약속하지만, 비현실적인 미래이기도 하고, 그 배당금도 실질적 가치가 없다. 이는 당시 종교, 곧 크리스트교의 모습을 반영한다.

교회는 교양 있는 사람이 모이는 곳이었고, 세속적인 것을 떠나 신성한 가치를 추구하는 곳이었다. 겉으로는 그랬다. 내부적으로는 허영과 위선만 가득했고, 세속적 가치, 곧 돈에 물들어 있었다. 굳이 비리로 연결 짓지 않더라도 애초에 당장 밥 먹고 살아가는 데는 돈이 필요했기에, 물질적 가치를 완전히 초월할 수는 없었다.

계몽주의 시대가 오고, 종교에 대한 회의적인 태도가 두드러졌다. 자연과학의 발달하고 진화론이 대두되면서 사람들은 신을 부정하기 시작했다. 이런 모습이 에레혼에는 혁명의 기운으로 반영되었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종교적 가치를 단순히 교회라고만 보는 것은 옳지 않다. 선한 일을 하면 복을 받는다, 사람은 남을 도우며 살아야 한다는 등의 정의를 추구하는 가치를 통틀어 일컫는다. 음악 은행을 이용하는 사람에게서 보이는 모습은 좋은 일을 한다는 자부심이었다. 교회가 내부적으로 어떻든, 표면적으로는 선을 추구했고, 이에 자부심을 느꼈다.

에레혼 사람들은 음악 은행을 겉으로는 지지하는 듯하지만, 내부적으로는 거부감을 느낀다. 반대로 이드그룬은 사람들이 겉으로는 관심 없는 듯해도 내적으로는 열렬히 지지한다.

“(이드그룬은) 전지전능한 존재이지만 고귀한 신념을 지닌 것은 아니었고, 가끔은 잔인하며 비이성적이었다. 여신을 가장 헌신적으로 숭배하는 이들조차 어느 정도 수치심을 품고 언행보다는 마음으로 모셨다. 여신을 입에 발린 말로 숭배하는 경우는 전무했으며 가장 신실하게 숭배하는 순간조차 종종 여신을 부인했다. 그래도 전반적인 면에서 이드그룬은 자비롭고 유용한 신이었으며….”[1]

언뜻 보기에 대체 무슨 신이 저렇지 싶지만, 음악 은행과 대조하여 볼 때 이드그룬이 돈, 곧 물질적 가치를 의미한다는 것은 명확하다. 교회에서 종교적 가치를 빼서 음악 은행으로 만든 것처럼, 돈에 종교적 가치를 넣어 이드그룬으로 만들었다.

돈은 세속적이고, 때로 추악하지만 누구에게나 필요하며 거의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대부분 돈을 대놓고 좋아한다고 말하지는 않아도, 싫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돈을 벌기 위해 일하면서도 돈을 밝히는 듯이 보이는 것은 경계한다.

물질적 가치와 종교적 가치도 인간과 뗄 수 없는 관계다. 두 가치는 대척점에 있는 듯 보이지만 언제나 공존한다. 누구나 선함을 동경하고 추구하지만 살아가는 데 있어 물질적인 것을 무시할 수는 없다. 항상 그 사이에서 가치판단의 갈림길에 서고, 매 순간 서로 다른 선택을 한다.

 

4. 비이성의 대학: 인간은 이성적인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사무엘 버틀러가 『에레혼』을 집필한 당시는 계몽주의가 대두되는 시기였다. 계몽주의라고 해도 딱 한 가지로 정의되지는 않지만, ‘인간의 이성이 핵심가치로 여겨졌음은 명확하다. 종교적 미신에서 벗어나 인간의 이성과 사유를 통한 진보를 추구했다. 사무엘 버틀러는 이를 또 뒤집어 에레혼에 비이성의 대학을 만든다.

이성이 명확하고 논리적인 추론을 한다면, 비이성은 비합리적이고 모호하며 합리화를 한다. 에레혼 학자들이 주장하는 바로는, 이성은 누구나 자연스럽게 추구하게 되기에, 비이성을 더욱 교육해야 한다. 이성만으로는 논리의 함정에 빠지기 쉽고, 결국 가장 비이성적인, 멍청한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이를 완충하기 위해 비이성이 필요하다.

이성적인 사유에 비이성이 공존함은 타당하다. 인간이 모든 것을 이성적으로 판단하기에 세상은 너무 크다. 그렇기에 무리하게 이성적으로만 생각하려 하면, 자기가 보지 못하는 것은 아예 배제해버린다. 그 결과는 집단 사이의 격리이고, 서로 이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이성적인 사유가 비이성으로 끝나는 것이다.

이 같은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비이성의 대학은 천재를 부정하고, 앞서나가는 것을 금한다. 모두 같은 사고방식을 하도록 가르치고, 반론은 받지 않는다.

놀랍게도, 이성을 추구한 끝에 과학이 현재 놓여있는 상황도 비슷하다. 과학은 이제 완전히 대중과 격리된 전문가 집단이 되어버렸다. 과학의 핵심가치인 반박 가능성은 집단 내의 권위 있는 사람에 한한다. 과거의 천재는 동경할지언정, 지금 새로운 의견을 내는 사람은 경계하고 때론 비웃는다. 인간은 현존하는 지구 상의 생물 중에 가장 이성적이지만, 동시에 비이성적이다.

 

5. 인간과 기계: 기계는 의식을 가질 수 있는가?

『에레혼』 23~25장에 걸쳐 나오는 「기계의 책」은 기계가 인간과 다름이 없음을 이야기하며 기계가 더 발전하기 전에 없애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다윈의 진화론을 기계에 적용한다. 흥미롭게도 다윈의 진화론은 생물을 기계적으로 이해한다고 해서 기계론적 진화론이라고도 한다. 진화론에 관심이 많았던 사무엘 버틀러는 오히려 이를 뒤집어 기계를 인간에 대응시키고 있다.

기계를 인간과 구분하는 데 있어 가장 주요한 것은 의식이다. 자기 의사가 있는가의 문제다. 「기계의 책」의 저자는 이런 의식이 우리가 인식하지 못할 뿐 기계가 행동함으로써 보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아직은 구조가 비교적 단순하여, ‘의식이라 부를 정도는 아니지만 머지않아 그 복잡성이 인간의 이해를 넘어가면, 그것을 의식이라 부를 만하다고 이야기한다.

의식이란 자기만의 목적을 가지는가의 문제다. 지금은 기계의 목적이 인간의 의도에 따르지만, 이를 벗어나는 순간 독립적인 의식을 가진다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 같은 일은 실제로도 일어나고 있다. 알파고의 등장이 충격을 주었던 것은, 단순히 인간을 이겼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생각하지 못한 행동을 보였고, 그것이 인간을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아직은 그 알고리즘을 인간이 이해하고 분석할 수 있지만, 복잡성이 극도에 이르면 인간의 목적에서 벗어난 기능을 가지게 된다.

기계가 극도로 복잡해져서 인간의 목적을 벗어난, 자기만의 독립적인 의식을 가질 때, 기계는 인간이라 할 수 있을까? 의식이야말로 인간다움일까? 그렇지는 않다. 동물은 의식이 있지만, 동물을 인간으로 인정하지는 않는다.

 

6. 동물은 인간이 될 수 있는가?

동물에 대해 따져보자. 돌고래는 실제 인간 못지않은 지능을 가졌고, 서로 이름도 부르는 등 굉장히 고등한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하다. 인간과 직접적인 소통도 상당 부분 성공했다.[2] 「사랑에 빠진 이스마엘」의 돌고래와 인간 사이의 교류[3]가 완전히 허황된 소리는 아니다. 그렇다면 돌고래는 인간인가?

돌고래를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외계인은 어떤가. 「네 인생의 이야기」의 헵타포드는 인간과 사고방식도, 생김새도, 관심사도 완전히 다르지만, 자기들끼리 사회를 형성하고, 인간과 동등 혹은 그 이상의 지적능력을 갖추고 있다.[4]

헵타포드를 인정한다면 왜 돌고래는 안되는가? 돌고래도 자기들끼리 사회를 형성하고 있고, 상당한 지능을 가지고 있다. 사고방식, 생김새, 관심사 등이 다를 뿐이다.

반려동물은 어떨까. 반려동물은 인간이 아니지만, 때론 인간과 같이 대우받는다. 인간과 소통하며, 인간과 같은 곳에서 먹고 잔다. 반려동물이 이같이 대우받을 수 있는 것은, 반려동물이 특별하기 때문이다. 반려동물을 키우고, 소중히 하는 사람은, 자기가 키우는 반려동물을 그저 수많은 개 중에 하나로 인식하지는 않을 것이다.

 

7. 결론: 독립적인 의식을 가지는 존재로서의 인간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집단으로서 어떤 한 경향을 보이고, 주변과 영향을 주고받는다. 하지만 그 개개인은 결코 집단으로만 이해할 수 없다. 같은 환경에서, 같은 조건으로 나고 자랄지라도 때때로 다른 선택을 한다. 종교적인 것을 우선시하다가도 물질적인 것을 따르고, 이성적 판단을 하면서 자기가 알 수 없는 것은 비이성적으로 외면한다. 그 순간이 모두 다르기에, 서로 다른 사람으로 구분되고, 이 특성을 개성이라 한다.

결론적으로, 인간은 집단적 특성 안에서 개성을 유지하는 개인이다. 우리가 양계장의 닭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 것은, 우리가 보기에 양계장 11번 케이지에 있는 닭이나, 12번 케이지에 있는 닭이나 똑같기 때문이다. 양계장의 닭은 비슷한 무언가로 대체될 수 있다. 노예도 마찬가지였고, 노동자도 마찬가지였다.

대체할 수 없는 개인으로 인정되기 위해서는 필수 불가결한 것이 독립적인 자기만의 목적, 의식이다. 인권 운동을 할 때 반드시 빠지지 않는 구호가 우리는 생각할 수 있는 인간이다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것이 받아들여졌을 때, 인간임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이미 인간인 존재로부터 의식있음을 보편적으로 인정받는 범주가 인간의 범주라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개[5]는 의식[6]이 있음에도 인간으로부터 그 의미를 인정받지 않아 인간이 아니다. 반대로, 그 의식이 개라는 집단의 것이 아니라 개별의 독립적인 것으로 인정된다면 인간이 될 수 있다.

반려동물은 아직 보편적이지는 않아도, 그 가족과 주변인에 한해서 인간이라 볼 수도 있다. 본인이 키우는 강아지는 분명히 다른 강아지와 구분되는 개체이며, 대체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직 보편적으로 인간이라 할 수는 없지만, 이미 인간사회에 깊숙이 들어온 반려동물은 굉장히 인간에 가깝다.

지금의 기계는 양산할 수 있고, 대체할 수 있다. 산업기계가 망가져도 새 제품으로 교체하면 아무 문제없다. 그렇기에 아직, 기계는 인간이라 할 수 없다. 하지만 기계도 AI가 발전하면서 단순한 개성이나마 가지기 시작했다. 언젠가는 인간과 평생 함께한 기계이기에, 동종의 다른 기계와는 차별화된 기계로 인식되고, 독립적인 존재가 인정받을 미래가 올지도 모른다. 그때는 기계를, 정확히는 그 데이터를, 인간이라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참조문헌

<책>
사무엘 버틀러, 한은경 역, 『에레혼』, 김영사, 2018.
찰스 다윈, 김관선 역, 『종의 기원』, 한길사, 2014.

<논문>

Hacene Benmechiche, 「Politics, Ethics, and Aesthetics in Erewhon: Samuel Butler’s Ambiguous Utopia」, 『الممارسات اللغوية』 34권, Departement of English, Mouloud Mammeri University, Tizi-Ouzou, 1~22, 2015.
Louis M. Herman, Palmer Morrel-Samuels, Adam A. Pack, 「Bottlenosed dolphin and human recognition of veridical and degraded video displays of an artificial gestural language」, 『Journal of Experimental Psychology: General』 119권 2호, 215~230, 1990.6.

 


 

[1] 사무엘 버틀러, 한은경 역, 「이드그룬과 이드그룬 교도」, 『에레혼』 17장, 김영사, 2018.
[2] Louis M. Herman, Palmer Morrel-Samuels, Adam A. Pack, 「Bottlenosed dolphin and human recognition of veridical and degraded video displays of an artificial gestural language」, 『Journal of Experimental Psychology: General』 119권 2호, 215~230, 1990.6. 몸짓으로 언어를 만들어 소통하는 것은 성공했다고 한다. 돌고래가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게 하여 소통하는 데도 성공했다고 하나, 그 출처는 확인하지 못했다.
[3] 저자 미상, 『세계 SF 걸작선』, 『사랑에 빠진 이슈마엘』, 출판사 미상, 연도 미상. 동명의 다른 책도 있으나, 해당 작품이 실려있는 책은 찾지 못했다. 단편집 제목과 단편 소설 제목만 확인할 수 있었다.
[4] 테드 창, 김상훈 역, 「네 인생의 이야기」, 『당신 인생의 이야기』, 엘리, 2016.
[5] 포유동물을 대표해서 개라고 했다. 파충류 등의 다른 동물은 뇌 구조상 차이 때문에 의식이 있는가, 없는가 따지기 힘드므로, 여기서는 일단 포유동물만 생각하겠다.
[6] 여기서 말하는 의식은 그 의미가 조금 모호하다. 개가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은 모두 인정하지만, 이를 개체별로 구분하지는 않는다. 말 그대로 생각할 수 있다, 곧 대뇌가 있다는 것만 인정되는 것이지, 유의미하게 사유한다고 인정되는 것은 아니다. 반면, 인간의 의식은 개인마다 개별적인 것으로 인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