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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인류로부터 지키는 방법 - 2020 소설의 이해 과제

지금도 제가 읽어본 책 중 손에 꼽는 단편집입니다. 슬쩍 훑어보는데 여전히 뭉클하게 하는 책이네요. ‘일단 그 구두부터 벗어.’ 이 말이 너무 좋아요. 세상이 곧 망할 것처럼 굴더라도 일단 우리는 당장의 일상을 살아내야 하겠죠. 당시 사회 문제의 거대함과 나 자신의 무력함에 여러모로 우울했었는데 이제 보니 저 무심한 한마디가 저에게 굉장히 큰 힘이 됐었던 것 같아요.
대학교 들어와서 과제로 작성한 글을 업로드합니다. 수정을 하고 올릴까도 했는데 대체로 너무 옛날에 쓴 글이라 지금 수정을 하자면 아예 새로 써야 하겠다 싶어 간단한 맞춤법 수정을 빼고는 그대로 올립니다.

 

지금도 제가 읽어본 책 중 손에 꼽는 단편집입니다. 슬쩍 훑어보는데 여전히 뭉클하게 하는 책이네요. ‘일단 그 구두부터 벗어.’ 이 말이 너무 좋아요. 세상이 곧 망할 것처럼 굴더라도 일단 우리는 당장의 일상을 살아내야 하겠죠. 당시 사회 문제의 거대함과 나 자신의 무력함에 여러모로 우울했었는데 이제 보니 저 무심한 한마디가 저에게 굉장히 큰 힘이 됐었던 것 같아요.


정세랑, 목소리를 드릴게요, 아작(e-book), 2020.

 

나는 23세기 사람들이 21세기 사람들을 역겨워할까 봐 두렵다. ……이 비정상적이고 기분 나쁜 풍요는 최악으로 끝날 것만 같다. 미래의 사람들이 이 시대를 경멸하지 않아도 될 방향으로 궤도를 수정할 수 있으면 좋겠다.(96%, 「작가의 말」) [1]

 

지난 2010년대, 2010년에서 2019년 사이에, 467종이 멸종했다. 화석으로 확인한 평균 멸종 속도의 400배가 넘는다.[2] 이 같이 멸종 속도가 급증한 데에는 지구온난화, 개발을 위한 숲 파괴, 이에 따른 서식지 파괴, 밀렵, 애완용이나 관상용으로 키우다가 유기한 외래종의 토종 생태계 침입 등 다양한 이유가 있다. 다양한 이유가 있다고 했지만 결국 하나의 원인으로 수렴한다. 인간 문명의 확장이다.

『목소리를 드릴게요』의 수록작 「리셋」과 「7교시」는 인류의 소모적인 문명이 마침내 종말을 맞이한 후 열리는 새로운 세계를 그린다. 「리셋」은 거대한 지렁이가 지표면을 모두 뒤엎어 인류 문명을 초기화한다. 7교시」의 세계도 이상기후와 고밀도 집단 사육의 영향으로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유행하고, 인류의 1/3이 죽는다.

 

「리셋」은 거대 지렁이가 뒤엎은 세계에서 동서남북 각 방향을 향하는 인물들의 시점으로 쓰인 일기를 하나로 엮은 단편이다. A.R은 거대 지렁이가 출몰한 연을 기점으로 하는 연도 표기다.

A.R. 원년, 나는 남쪽으로 걷기로 했다
A.R. 원년, 나는 북쪽으로 걷기로 했다
A.R. 2년, 나는 동쪽으로 걷기로 했다
A.R. 74년, 나는 서쪽으로 걷기로 했다 (「리셋」 소제목)

남쪽을 향하는 이야기는 한국이 배경이다. 거대 지렁이가 출몰하고, 그 탓에 피난길에 오른 한 사람이 있다. 그는 자연을 학대하고 수많은 종을 멸종시키며 존재하는 문명에 구역감을 느꼈다. 자연만이 아니라 인간까지 소외시키기에 더욱 문명이 끔찍했다.

“지렁이들은 제때 왔다…… 궤도는 가까스로 수정되었다. 나는 배낭에 들어 있던 은박 담요를 덮고 잠들며 가끔 웃는다. 내가 죽고 다른 모든 것들이 살아날 거란 기쁨에. 기이한 종류의 경배감에.” (17%, 「리셋」)

 그는 이 문명을 혐오했다. 이 문명이 망가트린 인간성도 기피했다. 그래서 피난길에도 사람들을 피한다. 너무 지쳐 폭력적일 의욕도 없는 사람들만 신뢰한다. 그는 무너져내리는 문명을 보고 안도한다. 폭력적인 문명의 집합체인 서울을 등지고, 남쪽을 향한다.

 

북쪽을 향하는 이야기는 망가져 가는 환경을 그래도 살려보려고 하던 사람의 이야기다. 그는 제네바에서 세계작물다양성재단의 정기 회의에 참여했다가 재난을 맞았다. 그는 씨앗 저장고의 열쇠를 가지고 있었고, 씨앗저장고의 문을 열 의무가 있었다. 그는 가족과 안전을 멀리하고 씨앗 저장고가 있는 북쪽을 향한다.

“나는 울면서 친구에게 말했다. 세상이 끝났다고. 아기들은 예방주사를 맞지 못할 거고, 어른들은 마흔이 되기 전에 다 죽어버릴 거라고, 미술관과 박물관들도 다 파괴되었다고, 우리가 세웠던 대책들은 아무것도 소용이 없을 거라고…….

‘일단 그 구두부터 벗어.’

언제나 절망 속에서 일해온 친구가 말했다.“ (19%, 「리셋」)

그는 문명을 사랑했다. 남쪽을 향한 인물과는 반대로. 이상기후에 사라져 가는 작물을 보존하는 곳에서 일하고 있었고, 문명이 비정상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계속되지 못할 것도 알았다. 그는 그 나름대로 언젠가 닥칠 재난을 준비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예정된 종말을 막을 만큼 적극적이지는 못했다. 거대 지렁이가 오지 않았어도 그의 노력은 결국 문명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이 동쪽을 향하는 이야기에서 암시된다.

그의 모습은 이 문명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으리라 믿는 우리의 안일한 태도를 보여줄지도 모르겠다. 그는 문명의 붕괴에 너무 쉽게 절망했다. 북쪽을 향하는 길에 잠깐 만난 언제나 절망 속에서 일해온 친구와의 대조는 머리로는 알지만 위기감은 없는, 안일함에 빠져있던 그의 과거를 부각한다.

 

이제 정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동쪽을 향하는 이야기가 진행된다. 지렁이를 사랑하는 연구자 부부가 거대 지렁이를 추적하던 중 죽고, 그 딸 앤이 뒤를 잇는다. 그들은 지구에 갑자기 방문한 거대 지렁이들을 연구하고 대책을 세운다. 그러면서도, 지렁이를 사랑하는 세 사람과 그들을 후원하던 석유 부자 빈 바라스 알 타니 왕자는 그들이 우려했던 최악의 미래가 오기 전에 지렁이가 궤도를 수정해 주었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나는 못 했지만 누군가는 멈췄어야 했어. 화석 연료 산업을, 거기서 파생된 다른 거대 기업들을. 여기저기에 기부와 후원을 하고 또 하면서도 새벽마다 죽고 싶었는데…… 너희 엄마들이 아니었으면 정말 죽어버렸을지도 몰라. 그런데 이젠 얼마나 깊이 잠드는지.” (23%, 「리셋」)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지렁이를 관찰하고 연구하며 동부를 향한다. 뉴욕에 가까워지면서 진상에 근접한다. 가장 깊은 진상은 앤만 깨닫지만, 모른 체하기로 한다.

「리셋」에는 재난에 절망하지만 한 편으론 안심하는, 심지어는 반기는 인물들이 나온다. 인류가 이대로는 안 된다, 더 늦기 전에 이 파괴적인 문명의 확장을 막지 않으면 큰일 날 것 같다 의심했던 인물들이다. 그들의 서술을 통해서 재난은 마땅히 이뤄져야 하는 일로 묘사된다.

마땅히 이뤄져야 할 일이더라도 재난은 가볍게 그려지지 않는다. 슬픔을 느끼기를 유예해야 할 만큼 많은 사람이 죽는다.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없을 것이라는 예감에 좌절한다. 그동안 환경문제를 외면해왔던 대가는 가볍지 않다. 계속 이렇게 미루고 더 늦는다면 우리가 치러야 할 대가도 그럴지 모른다. 그 대가가 가장 잔인한 점은, 자연을 사랑했던 사람이라고 피해 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재난이 지나가고 인류는 다시 일어선다. 다시 세워진 문명의 모습은 퍽 인상적이다. 문명은 살아남았다. 해는 서쪽을 향하고, 문명은 등불을 밝힌다.[3]

“재앙을 만난 사람들을 도와주러 가고 있잖아요, 그거 문명이 잘 굴러가고 있다는 소리예요.” (32%, 「리셋」)

인류 문명은 필요하다. 문명은 많은 재앙에서 인간을 보호한다. 약한 사람을 약탈과 폭력에서 지킨다. 더 많은 가능성을 상상할 수 있게 한다. 문명이 인간다운 삶을 성취하는데 기여하는 바는 작지 않다. 결코 원시는, 야만은 문명보다 낫다고 할 수 없다. 북쪽을 향하던 사람의 좌절은 과장이 아니다.

지렁이가 지구를 한 번 뒤엎은 뒤에 인류는 다시 문명을 세운다. 지렁이가 남긴 지하동굴을 이용하면서 지하동굴보다도 더 깊이 땅을 파고 내려가 도시를 건설한다. 지열로 에너지를 자급하고 물질을 순환, 재활용하여 외부를 오염시키지 않는다. 더는 가축도 반려동물도 기르지 않는다.

현대의 파괴적인 문명의 정세랑 작가의 대안은 원시로의 회귀가 아니라 격리다. 「리셋」의 인류는 지하에 문명을 건설하고, 인류가 쓰고 버리는 모든 것을 문명 안에서 처리한다. 자연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자연을 스스로 있게 놔둔다.

“물 반 물고기 반이 농담이 아니었군요. 이렇게 많아도 되는 걸까요?”
“뭐, 이젠 자기들끼리 알아서 하겠죠.” (34%, 「리셋」)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고는 낡았고 위험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인간은 다른 생물과 같은 선상에 두기엔 좀 부담스러운 생물이다. 그 영향력이 최소한 지구 생태계에 한해서는 너무 거대하다. 하지만 인류가 문명을 포기하고 원시로 돌아가는 것은 어떤 영화의 악역처럼 인간을 모두 죽이지 않는 한 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인간이 세운 소중한 가치, 인권을 포기하는 일이다. 인류가 자살할 수는 없으니 남은 가능한 선택지는 격리다. 자연이 자연답게 있게끔 인간을 자연에서 떨어트려 놓는다.

이런 문명은 그저 순진한 유토피아​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이 문명은 완벽하지 않고, 정체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다르다. 이제 막 새로운 시도를 시작한 문명이다. 과거의 실수를 반복할 가능성조차 그대로 품고 있다. 실패할 수 있기 때문에 아직 고민할 여지가 많다. 자연과 인간이 공존할 수 있는 이 시도는 그래서 기대된다.

“묶인 생명도 갇힌 생명도 없이 미지의 영역으로 나아가고 있다.” (32%, 「리셋」)

 

「리셋」이 무너지는 문명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회한을 중점적으로 다뤘다면 「7교시」는 새로운 문명의 모습을 좀 더 자세히 조명한다. 7교시」의 세계에서 인류는 치명적인 바이러스를 마주하고, 120억 인구의 1/3, 40억을 잃는다. 남은 80억의 사람들은 자연을 위해서, 경제적 성장만을 위해 폭주하던 정부와 기업에 반해서, 전쟁을 일으킨다. 그렇게 시작된 혁명은 성공하고 세계는 환경주의를 받아들인다. 자연을 지키기 위한 기술이 발전하고 정책이 마련된다. 인류는 배양육과 완전 자원 순환시스템을 완성하여 자신을 자연으로부터 격리한다. 자연은 관찰의 대상으로만 남는다.

「리셋」에서도 인구 제한 정책은 언급되지만, 7교시」에서는 더 적극적이고 완성되어 있다. 25억이라는 적정 인구수를 유지하기 위해 인공포궁과 피임도구를 개발한다. 성관계와 임신 및 출산과 양육을 완전히 분리한다.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은 사회의 자원으로 이뤄진다. 양육자에게 까다로운 자격을 요구해서 더는 아이들이 학대받지 않게 한다. 출산도 양육도 국가의 책임이 되었으므로, 정상 가족의 패러다임도 해체된다.

국가 단위의 계획적인 출산을 하면서 폭력적 유전자도 배제한 공동체 유전자가 보편화된다. 본인의 유전자를 쓸지 공동체 유전자를 쓸지는 선택할 수 있는 것 같지만, 인간이 함부로 인간의 유전자를 손대도 되는가 하는 고민은 남는다. 공동체 유전자가 20세기 우생학과 다르다는 암시는 있지만 자세한 설명은 없다. 유전자 일부를 배제한다 하더라도 인류에게 당장 큰 지장이 있지는 않겠지만, 그것이 장기적으로 어떤 결과를 낳을지는 속단하기 어렵다.

이 외에도 이 대안 문명에 던질 수 있는 질문은 많다.

“다음 시간은 토론이었다. 도심 압축 때문에 발생한 이주민들에 대한 보상이 적절했는지, 공동체 유전자 사용과 20세기의 우생학은 어떤 면에서 다른지, 지나치게 공격성을 제거한 인류가 멸종을 향하지는 않을지, 현 정치체제가 민주주의가 아닌 환경주의적 독재라는 의견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등 민감한 주제들로 이야기해야 했다.” (84%, 「7교시」)

정세랑 작가가 그린 이 세계가 무엇보다 매력적인 점이, 이런 질문들을 외면하지 않고 긍정한다는 점이다. 생각을 그만두지 않는다. 이상적인 형태로 멈춰있지 않고 역동적이다. 비록 이 작품은 질문하는 데에서 그치고 더 말하지 않지만, 답을 아직 모르기에 이 세계가 우리가 고민할만한 세계이지 않은가 생각이 든다.



[1] e-book은 쪽수가 일정하지 않아서 쪽수 대신 백분율로 표시했다.
[2] 이성규, 지난 10년간 멸종된 동물은?, The Science Times, 2020 1 10. BIBLIOGRAPHY  \l 1042
[3] 「리셋」 마지막 문장의 표현을 빌렸다. 원 문장은 마지막 햇빛이 서쪽으로 사라지고 나자, 램프들이 일제히 빛을 밝혔다이다.